정의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존재할까?
어떤 상황에서도 정의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본질적 가치는 무엇일까?
정의란 무엇인가. 어떤 행위가 정의롭거나 도덕적인지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에서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세계를 휘감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발병의 초창기에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활동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의 장기화에 따라 현재 8월 여름에는 마스크의 답답함을 참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 착용을 꺼리거나 턱에 걸치고 있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출입이 제한되는 일이 많다.
이 문제를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와 공공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재고해보자. 우리가 마스크를 쓰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국가나 특정 집단이 자신의 자유권을 침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현재와 같은 비상상황에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아 발생하는 집단 전염은 결국 공공의 이익에 반하며, 이 때문에 마스크 착용을 강제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이 논리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가 어느 정도 희생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후자와 같은 입장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라고 한다. 이 원칙으로 위 상황을 바라보면, 마스크를 써야 하는 고통보다 전염병의 확산으로 인한 고통이 더 크다는 논리가 기반된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공리주의가 과연 정의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 알아보자.
공리주의는 정의를 판별함에 있어서, 일관성을 확보하고 다수의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유용한 가치관이다. 하지만 이번 글은 그 공리주의의 효율성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다. 공리주의가 정말 모든 행위의 정의를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것에서 시작해, 우리가 단 하나의 가치관에 매몰된 사고를 하지 않도록 고민을 해봄에 의미를 두었다.
벤담의 공리주의, 그 약점은?
영국의 도덕 철학자이자 법 개혁가인 제러미 벤담은 공리주의 원칙을 만들었다. 공리주의의 핵심은 간결하며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하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의 극대화, 즉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보다 많게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벤담에 따르면, '공리'를 극대화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옳다. 그가 말하는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이나 불행을 막는 일체를 의미한다.
공리주의 논리의 기반은 우리의 감정이기 때문에, 우리의 쾌락과 고통에 의해 정의를 판별한다. 개인적 영역뿐만 아니라 입법 차원의 사회적 영역까지도 '공리'라는 잣대로 도덕성을 판단한다.
위의 마스크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듯, 공리주의에 반하는 논리의 핵심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벤담은 개인의 권리의 중요성조차도 공리주의로 설명 가능하다고 말한다. 다음의 간단한 사례로 우리의 가치판단을 구체화해보자.
고대 로마에서는 군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서 원형 경기장에 사자와 기독교도들을 함께 풀어놓았다. 단순히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이 사례를 살펴보면, 그 기독교도들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얻겠지만, 소수의 고통일 뿐이다. 단지 쾌락의 총량만 계산해본다면, 수많은 군중들이 얻게 되는 쾌락이 훨씬 크기 때문에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이 행위는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행위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가?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은가? 단순히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행위를 용납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담 벤담이 틀린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근거를 찾은 것일까?
하지만 벤담은 이 사례를 '기본권에 대한 존중'에 근거해서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거시적으로 공리를 계산하여 설명하려 한다. 기독교도들이 죄 없이 희생되는 사회는 장기적으로 보면, 다수의 쾌락을 위해서 소수의 희생이 당연시 여겨지는 풍조가 형성될 것이다. 결국 이 사회는 시민들의 폭력성 및 공포감이라는 고통을 지속적으로 형성할 것이고, 이 고통이 쾌락을 넘어서면 이 같은 게임은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벤담의 주장을 들어보니 공리주의에 의해 논리적이면서도 명쾌하게, 기독교인을 사자에게 던지는 일이 정의롭지 않다고 설명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인권이나 자유와 같은 중요한 가치를 빠뜨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어렵다. 결국 위 같은 잔인한 행위가 사회의 고통을 거의 야기하지 않는 수준이라면 정의로 판별되기 때문이다.
물론 공리주의는 꽤 역사가 깊은 관점이며, 현대 정치의 의사결정 과정에도 많이 사용될 정도로 뿌리가 탄탄하다. 그만큼 문제를 해결하고,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는 원칙이라는 증거이다. 실제로 공리주의는 가치 대립의 사안들에 대한 결정에 있어 실질적으로 매우 유용한 사고방식이다. 결국 사회의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서는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권과 대립되는 특정 상황에서는 공리주의로 판단하기에는 도덕성과 윤리성을 포기하는 비인간적 결론이 발생한다.
공리주의의 논리성에 매료되어서, 맹목적으로 공리주의에 기반하여 모든 사회 현상의 정의를 판별하기에는 인간으로서 보장받아야 할 중요한 가치들 사이에서 많은 모순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본질적으로 고통과 쾌락이 어떤 객관적 지표에 근거하여 계산되는지에 대해 재고해보면, 모두 주관적인 판단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행위가 다른 행위보다 큰 고통이나 쾌락을 만들어 낸다고 단정 짓는 주장의 기반은 흔히 요즘 말로 '뇌피셜'인 것이다.
공리주의적으로 옳지만 기본권을 침해하는 특정 행위에 대해서는,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본능적 반발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벤담의 공리주의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밀의 공리주의, 그런데 그거 공리주의 맞아?
위에서 설명한 벤담의 공리주의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벤담의 제자 존 스튜어트 밀은 인간성을 공리주의에 포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비판과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모두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측정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비판을 반박하기 위해 공리주의를 재정의한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지나치게 계산적이어서 인간적이지 않으며, 실제로 기본권이라는 요소 자체를 고려대상에서 배제했다. 밀은 이에 대해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유론'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립은 권리이며 절대적인 것이다. 개인은 자신에 대한,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주권을 갖는다."
그는 위의 논리로 기본권 보장을 공리주의의 범주에 들여온다.
그런데 공리주의가 근본적으로 개인의 기본권을 인정하게 되면, 공리에 어긋나는 행위에도 손을 들어주어야 하는 이중성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소수의 종교집단을 혐오하는 절대다수의 시민들이 그들을 핍박하는 행위는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봤을 때 정당하다. 하지만 소수의 신도들의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하는 밀의 자유 옹호 논리는 공리주의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밀은 자신의 공리주의를 넓은 의미의 공리라고 말하며, 그 공리가 진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이익이 되는 공리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기본권을 '어떤 상황에서 지켜져야 하는 절대 가치'가 아니라 '거시적 공리의 발전을 위한 인류 문화의 성숙' 측면에서 옹호하는 것이다. 즉,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인류 최대의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충분히 설득력 있다. 공리의 의미를 확대함으로써 기존 벤담의 최대 약점을 탁월하게 보완했다. 하지만 공리의 의미를 확대했다 할지라도,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관점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기본권 보장에 대한 확실한 논리 기반을 만들기는 어렵다. 결국은 특정 상황에서 모순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가 기본권 보장을 중시하는 이유는 인류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럼 하나의 가정을 해보자. 만약 어떤 국가가 찢어지게 가난해서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바닥인 상황에서, 경제를 혁신할 독재자가 나타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는 대신, 그들을 배불릴 수 있다고 한다면 공리주의의 관점에서는 정당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위에서 말한 종교에 대한 문제도, 소수가 믿는 종교가 장기적 관점에서 사회에 해가 된다면 공리주의는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진다. 즉, 밀의 공리주의 또한 벤담의 공리주의와 마찬가지로, 기본권이라는 것은 단지 상황의 볼모로서 절대 불변의 가치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공리 판단 근거일 뿐인 것이다.
벤담의 공리주의에서 공리의 판단 근거는 우리의 감정적 요소인 쾌락과 고통인데, 밀의 공리주의에서는 인류 번영이라는 가치를 끌어들였다. 만약 미래 인류의 풍족한 삶을 보장해줄 수 있는 행위가 있으나, 그 행위 때문에 현재 우리 인류 모두가 고통받아야 한다고 가정했을 때, 벤담의 공리주의에서는 이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지만, 밀의 공리주의에서는 정당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또 재밌는 것은 벤담의 공리주의에서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모든 가치를 하나의 잣대로 계량하는데 반해, 밀의 공리주의에서는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으로 쾌락의 양뿐 아니라 질을 고려한다. 쉽게 설명하면, 벤담의 공리주의에 기반하면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쾌락과 도박을 통해 느끼는 쾌락의 양이 같다면 그냥 같은 쾌락일 뿐이다. 하지만 밀의 공리주의는 이 두 행위 사이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다.
밀이 쾌락에 대한 질적 구분을 나눈 이유는 벤담의 쾌락 논리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정의롭다 할 수 없는 일들'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지역에 뮤지컬 공연장과 투견 도박장이 있을 때, 투견 도박장에서 더 큰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가정해보자. 밀은 이때 정부는 투견 도박장에 보조금을 주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대중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벤담의 논리를 구해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행위가 더욱 고급이고 저급인지, 가치 있고 없는지, 대체 어떤 기준으로 누가 판별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밀은 사람들이 더 많이 바라는 행위가 더욱 가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독서하는 것이 누워서 생각 없이 시트콤을 보는 것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만, 후자를 더 선호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그렇담 시트콤을 보는 행위가 독서보다 고급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이렇게 계속 꼬리를 무는 질문에 결국 밀은 인간이 지닌 존엄성과 고급 능력으로 인한 인류의 발전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밀은 공리주의의 전제에서 벗어나버린다. 인간의 욕구와 쾌락은 더 이상 공리의 판단 근거가 아니게 된다.
밀이 개성을 강조해 칭송한 것은 자유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데 이는 공리주의에 대한 일종의 이단 행위라 할 만하다. 공리를 넘어서는 도덕적 이상(인격과 인류 번영)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벤담의 원칙을 정교하게 다듬었다기보다는 포기했다고 볼 수 있다.
- 마이클 샌델 (저자)
밀의 공리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류 발전이라는 대의명분에, 쾌락은 뒷전으로 밀리게 되고 이것은 공리주의의 근간을 흔들어 버린다. 결국 밀은 공리주의에서 인간성을 찾다 일관성을 잃게 되었다. 일관된 판단을 쌓을 수 없는 이론은 장기적으로 판단 근거의 기반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공리주의는 많은 상황에서 정의를 설명할 수 있지만, 정의를 판별하는 절대적 가치로 자리잡기에는 위험하다. 정의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공리주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