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의무는 사고팔아도 되는가?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제39조 1항에 적혀있는 문구이다. 여기서의 법률은 병역법을 말하며, 병역법 제1장 총칙의 제3조 병역의무의 1항에는 "대한민국 국민인 남성은 대한민국 헌법과 이 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여성은 지원에 의하여 현역 및 예비역으로만 복무할 수 있다."라는 법률이 제정되어있다.
이번 글에서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를 기반으로 국민의 의무가 가지는 가치를, 제도의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그중에서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성이라면 누구나 책임을 가지는, 병역의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일단 이 글에서는 여성의 국방의 의무 수행에 대한 논점은 일체 다루지 않는 점을 명시한다. 현 병역 의무 이행을 제도적 측면에서 재고해보고자 한다.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하기 위해서 각 국가가 처한 상황적 요인보다는, 정의의 측면에서 각 제도가 가지는 가치에 논점을 두도록 할 것이다.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방법, 모병제와 징병제
여기서 국군의 필요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강력한 군대가 없다면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던 자유까지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군인이 되어야 한다. 그 군인을 선발하는 제도에 대한 논의를 해보려고 한다.
일단 개인적 차원에서 징병제를 살펴보자.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미필 남성들은 거의 대부분 모병제를 원할 것이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사업, 다니던 회사, 공부하는 학교 등 사회에서의 역할이나 직업을 포기하고 2년 가까이되는 기간 동안 국가에 봉사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단지 시기와 복무 형태를 조금 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번에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병역 제도를 바라보자. '자유와 공정성', 그리고 '미덕과 공동선'이라는 관점에서 병역제도를 살펴보면, 모병제가 과연 정답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물론 여기에는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적 요인이 근거로 제시될 수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런 것들을 말하자면 문제가 끝도 없이 복잡해진다. 우리는 더 본질적으로 '어떤 병역 제도가 과연 정의일까?'에 대한 논점에서 병역 제도를 살펴볼 것이다.
현재 병역을 분담하는 방법은 크게 나누면 모병제와 징병제이다. 그 시행 방침이나 법률은 국가별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문제를 단순화시키기 위해서 둘로 나누어서 이야기하려 한다.
징병제는 사실상 강제징용이다. 대상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복무 조건만 충족한다면, 수년의 기간 동안 나라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여기서 징병제의 가장 큰 문제는 자유와 선택권의 결여라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 매우 낮은 임금과 복리후생도 큰 문제점 중 하나이다.
한편 모병제를 살펴보면, 정말 이상적인 제도로 보인다. 개인에게 자유와 선택권이 주어지고, 높은 임금과 함께 제공되는 복리후생은 징병제와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많은 국가들은 국민들의 자유를 박탈하면서까지 징병제를 유지하려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많은 상황적 요인과 현실적 문제들이 있겠지만, 그 문제들만 해결된다면 모병제를 하는데에 전혀 걸림돌이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공정성과 자유' 그리고 '시민의 미덕과 공동선'을 관점으로 각 제도를 천천히 뜯어볼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 전개되는 내용에 대해 필자는 '어느 제도가 더 좋다'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 제도의 본질적 가치를 논해보려 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시한다.
공정성과 자유의 관점, 모병제는 진정으로 자유로운가?
징병제는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위험한 직업인 군인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대상자들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징병제에 자유가 결여되어있다는 점에는 아마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모병제는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국방의 의무라는 책임을 합의의 문제로 이끌어낸 모병제, 과연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 맞을까?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직업 선택에는 자신의 경제적 여건이 꽤나 작용한다. 경제적 여건이 좋은 사람들이 막노동이나 청소부와 같이 힘든 일을 생업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모병제에서는 군인이라는 직업도 마찬가지이다. 군인이라는 직업은 고되고 막중한 책임을 가지는, 힘든 일이다. 어떤 사람은 사명감과 애국심에 이끌려 군에 자진 입대했을지 몰라도, 누군가는 사회에서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어려워 입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모병제를 시행하고 있는 미국을 살펴보면, 위 의견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2018년 기준 미군에 입대한 사람들의 경제 계층을 살펴보자. 연간 총 입대하는 사람의 19%는 극빈층, 60%는 평균 소득의 계층이, 상류층에서는 17%가 입대한다. 상류층 입대가 대부분 장교로의 복무에 해당하는 것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병사로의 지원은 평균 이하의 소득 계층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자신의 손으로 자원입대했지만, 사회의 강제성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군인이라는 직업은 여타 직업과는 다르게, '국방의 의무'라는 공동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있다. 즉, 개인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하나의 직업이라는 명분으로 국방의 책임을 떠맡겨 버린 것이다. 사실상 모병제와 징병제는 강제하는 방법과 정도만 다를 뿐이기 때문에, '징병제는 의무', '모병제는 자유'라고 대립시키는 것은 짧은 생각이다.
막말로 고급 교육을 받고, 주거지 및 문화생활에 필요한 경제적 요건이 넉넉하다면, 몇이나 되는 사람이 군인이 되려고 할까? 모병제가 과연 진실로 공정하고 자유로운 제도인지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시민의 미덕과 공동선의 관점, 모병제는 용병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군 복무는 시민의 의무이다. 즉, 모든 시민은 국가의 안전을 위해 나라에 봉사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이 때문에 모병제는 시민의 미덕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사회의 공리 측면에서는, 상황적 요인이 작용한다 할지라도, 자진해서 군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만이 군에 복무하는 것이 모두가 편안해지는 사회일지도 모른다. 강제 징병을 통한 군 복무는 사실상 노예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누군가 개인에게 특정 직업을 그것도 매우 낮은 임금으로, 강제하는 것은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럼에도 징병제는 국방의 의무라는 명분으로 그러한 비상식적 행위를 강제한다.
하지만 징병제가 비상식적 행위로 간주되는 것은 군인이란 직업을 단지 프로그래머나 의사와 같이 자신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일반적 경우라고 생각할 때이다. 국민의 의무라는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징병제를 통한 공평한 의무 분담이라는 명분으로 이 강제징용이 합리화될 수 있다. 국방의 의무를 신성한 시민의 이상을 지키는 행위로 생각한다면, 징병제는 그야말로 공동선을 실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제도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한편 징병제가 기반하는 시민의 미덕이 모병제에서는 중요치 않은 가치가 된다. 병역의 의무가 자유 시장 논리에 기반된 이상, 국가의 안전이라는 임무만 잘 수행하면 되는, 사실상 하나의 직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군인들이 애국심이라는 가치에 이끌려 복무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방의 의무를 자유 시장에 떠맡겨놓고서 애국심과 시민의 미덕이라는 가치를 모병제에 동시에 내포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결국에는 각 제도는 그것이 기반한 논리에 따라 결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한 미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계속되면서 병력 충원이 어려워지자. 임시 비자로 본국에 살고 있는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병사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상당한 급여와 미국 시민권 조기 발급 등의 혜택이 제공된다. 현재는 수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이 미군에 복무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인력이 부족해지자, 민간에 국방의 의무를 맡기기 시작했다. 결국 시장 논리에 기반한 모병제가 용병을 허용하게 되는 순간이다. 병역을 여러 직업 중 하나로 본다면, 신병 모집을 반드시 정부가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실제로 미국은 현재 군 기능의 상당 부분을 민간 기업에 맡기고 있으며,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 중에는 민간 기업 소속 용병들이 상당수이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신성한 명예와 국방의 의무는 그들이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다. 단지 임무의 목적을 달성하고 대금을 지불받는 것만이 그들의 관심사이다. 용병을 고용하면서부터는, 군대는 더 이상 신성한 수호자가 아니며 단지 하나의 직업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이 경우에 국방의 의무는 단지 시장에 내놓은 상품에 불과한 것이다.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누군가는 세금을 내고, 누군가는 군에 복무하거나 용병이 되는 것이다. 이는 시민의 미덕과 공동선을 포기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징병에 대한 자유를 얻게 된다.
모병제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를 보면, 모병제 시행을 통해 전문적인 직업 군인을 확보하여 국방력이 세계 최고이다. 또한 군인들은 공공의 의무를 혼자 짊어지고 있는 희생을 통해, 더욱 질 높은 대우를 받을 명분도 가질 수 있는 등 장점이 많다. 사실 국방의 의무에 대한 시민의 미덕과 공동선을 포기하면 너무나도 합리적인 제도이다. '경찰이나 공무원과 같이 국가의 안전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는 직업은 강제하지 않고 자유 시장 논리에 기반하는데, 군인이라고 그렇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라는 의견도 타당할 수 있다.
여기서 그 가치들이 정말 포기해도 되는 가치인지는 개인의 판단에 달렸다. 병역은 모든 시민이 해야 하는 의무일까, 아니면 노동 시장에 의해 적절하게 운용되고 있는 하나의 힘든 직업 중 하나일까. 이 질문에 좀 더 깊이 답하기 위해서는 '민주 사회의 시민은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며, 그 의무는 어떻게 생겨나는가?'라는 포괄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철학 이론들이 서로 다른 대답들을 내놓는다.
그 대답에 관해서는 추후에 작성될 글에서, '자유와 의무', 그리고 '정의와 공동선'의 본질을 살펴보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